글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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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 있길 좋아했대. 400만원 화소 짜리 카메라가 40만원이 웃도는 가격으로 판매되던 때였으니까. 그들은 내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나에게는 지금과 같은 문제는 없었어. 내내 살았으니까. 구구단을 외우던 김치냉장고 박스는 정말 컸어. 거긴 내 집이었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어. 한동안 그랬던 것 같아.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이곳에 오면 전부 생각이 나. 같은 책상 같은 의자. 내 책상 속에는 지폐가 있었고 그건 그대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어. 내게 죄책감은 없었어.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 마저. 선물. 내게 필요했던건 사실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어. 나를 과대평가 한거지. 이런, 머리가 가렵네. 깨달은 척을 했어. 두손을 모아 싹싹 빌었고. 그 끝에는 누가 있었지?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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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오렌지를 연상 시키는 그런 빛깔의 비누는 언제 봐도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크기도 지난달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고, 비누에서 뿜어져 나오는 귤과 레몬 계열의 향기도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그의 세계는 대부분 튀지 않는 쪽의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한두번 보는 걸로는 오롯이 기억하기 힘든 것들로. 머리도, 입는 옷도, 받거나 구매한 집안 곳곳의 가구나 식기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오롯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 몇몇은 그걸두고 '안전주의'라고 불렀다. 그에 대해 그는 동의하거나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아마도 그런걸테니 말이다. 젖은 머리를 수건(어떤 행사에 갔을 때 판촉물로 받아왔다)으로 탈탈 말리던 그의 시선 끝에는 진한 오렌지색의 비누가 시야 끝에 걸려 있었다. 몇개월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라면 1년 반 뒤 계약이 끝나는 집에서 이사를 갈 때가 되서야 정리하게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멈칫하게 했다. 지금이라도 버려야 하나.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에 말이다. 혹시라도 저 비누에 안 좋은 기운이 섞여 있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밤바다 오렌지에 짓눌리는 꿈이라던가 비눗물을 연거푸 먹는 꿈을 꿔야 한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욕실을 나서며 그는 결국 한가지를 타협하기로 한다. 색이라도 눈에 덜 띄게 비누망을 하나 구매해 그 안에 넣어두자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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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지낸 사람은 그가 누구보다 물을 많이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걸으면서도,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 그는 늘 물을 마셨고 물병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아니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걸까? 가령 건강 같은. 그의 이런 특징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늘 '목이 마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수긍한뒤 잠시 동했던 호기심을 뒷편으로 넘긴다. 사실 그는 긴장을 하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얘기인즉슨 그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사실 그가 자는 동안에도 긴장을 풀고 있다는 사실 역시 100% 확신할 수 없다) 긴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것이다. 스스로를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탓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이런 특징이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